가끔 램프의 지니를 만나는 상황이 오면 어떤 소원을 빌까 망상할 때가 있다.
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고, 재력도 갖추고 싶고, 외모도 아름답고 싶다. 욕심 나는 게 잔뜩이다. 뭐, 망상인데 뭔들 못 바랄까.
하지만 망상 속에서나마 딱 한가지만 바래야 된다면.
최정상 프로기사들과 겨룰 수 있을 만큼 바둑 실력이 일취월장하면 좋겠다.
그래서, 아마 단증을 따고, 삼성화재배 아마대회에 우승해 당당히 본대회 예선에 나가고 싶다.
예선을 통과하는 과정에 한 명 쯤은 왕년의 세계대회 우승자를 만나 완승하며 꽤 요란한 이슈 속에서 본선에 진출하고 싶다.
개막식 조추첨에서 당당히 세돌 사범을 지명해 좌중을 기함시키고 싶다. 술렁임 속에서 사회자가 겨우 놀라움을 추스리며 물을 것이다.
아니 왜!
"제 일생 소원이 한 번쯤은 이세돌 9단과 대등한 바둑을 둬 보는 거였어요. 이제 소원을 이루었으니 내일 바둑을 다 둔 후 누가 죽인대도 기꺼이 눈을 감겠어요~~"
흑흑흑.
하지만 그대로 죽으면 안 된다. 이기든 지든 국후 그 날 두었던 바둑판을 뒤집어 싸인을 꼭 받아내고 가보로 남기라는 유언까지 남겨야 된다. 한국기원이 그 바둑판 절대 못 주겠다면, 들고 튀기라도 한 뒤 죽어야 된다.
농담 같은가?
절대 아니다.
내가 이제 나이가 들었다고 절감할 때가 저런 망상을 하는 순간인데, 이제 뭔가 하나라도 더 해내기 위해 노력하는 것 보다, 그냥 절대 있을 수 없는 꿈이나 꾸며 히히덕대며 여유 시간을 씹어 먹는 게 더 건설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. 그 순간들이 너무나 즐겁고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고양감을 주기 때문이다.
바둑에 바자도 모르던 주제에 바둑TV 앞에 들러 붙고, 바둑교실을 찾으러 다니며 기꺼이 시간과 돈을 투자한 이유가 다 뭐겠는가.
세돌 사범의 바둑에 반했고, 한톨이나마 그 바둑을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.
내가 열 다섯만 되었어도(그것도 꽤 늦은 나이지만) 전문 도장에 나가 바둑 기사가 되고자 현실적 꿈이라도 꿔 볼텐데, 이미 머리가 굳고 창의력 같은 건 쥐뿔만큼도 없는 나이라 망상 밖에 할 수 없다는 게 얼마나 아쉬운지.
내 머릿속 망상극장 다 꺼집어내어 이야기로 만든다면 히카루의 바둑보다 더 장황하고 얼척없는 대하 소설이 나올 거라 확신한다. 물론 재미는 보장 못하지만.
그런데 어쩌나.
삐긋삐긋 말 많고 탈 많더니 기어이 세돌 사범이 기사 휴직계를 제출했다고 한다.
지난 후지쯔배에서 창하오9단에게 패한 후 오랫동안 복기를 하고, "그동안 즐거운 승부였다!"란 말을 전했다고 한다.
어제 TV바둑아시아대회 개막식에선 “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한국에서 마지막 대국이 될 것 같다. 최선을 다해 좋은 내용 보여주도록 하겠다.”라 말하며 눈시울을 붉혔다고 한다.
휴직서 내용으론 2010년 12월 31일까지 18개월간 휴직한 후 2011년 1월에 복직한다고 하지만, 아무래도 앞으로 세돌 사범의 바둑을 다시 볼 날이 올지 걱정이 앞선다.
구구절절 한국기원의 웃기는 행태에 대해선 욕하고 싶은 마음 굴뚝 같지만, 일단 욱심을 가라앉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나 하겠다.
6월 30일 이후로 세돌 사범이 복귀할 때까지 바둑 따위 이제 안 본다.
이대로 은퇴한다면, 까짓, 영원히 안 본다.
랭킹 1위 기사라면 어려운 이 때에 안정적인 스폰서 유치를 위해서라도 한국바둑리그 같은 기전엔 참석하는 게 의무라고 헛소리 하는 인간들이 있는데. 웃기는 소리 작작 좀 하라지.
랭킹 1위 기사가 참가한 기전이 흥행하기 더 유리한 건 맞지만, 그래서 후원 유지에 도움이 되는 건 맞겠지만, 랭킹 1위 기사의 참가 여부가 기전 흥행에 필수 조건이 되는 건 아니다.
당장 랭킹 1위 기사완 영 거리가 먼 신예기사들만의 기전인 오스람코리아배라든지, 얼마 전까지 자타공인 체감 한국 랭킹 1위였던 이창호 9단이 몇 해째 참가를 고사해온 박카스배 천원전의 인기는 뭐라 설명할텐가. 그런 기전 계속 후원해온 오스람코리아나 동아제약이 돈이 남아 돌아 기전 스폰서를 했겠는가.
연승 방식이라든지, 한중 챔피언 결정전이라든지. 나름 참신한 그 기전만의 개성이 바둑팬들의 흥미를 돋웠기에 흥행도 스폰도 유지 할 수 있었던 거다.
말만 프로 프로 하지 말고 다른 프로 종목들이 스포츠 마케팅에 얼마나 돈 퍼부으며 발버둥치는 지 본 좀 받아라지. 그렇게 돈 퍼붓고도 경기장 텅텅비는 경우 허다하다. 어쩌겠는가 겸허히 받아들이고 더 머리 짜내 팬심 이끌려 계속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.
그런데 한국기원은 어떤가.
기껏 하는 노력이란 게 랭킹 1위 기사가 꼭 특정 기전에 참가해 흥행과 후원 유지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헛소리나 해샀고, 싫다니 엉뚱한 걸로 핍박이나 해댄다.
중국리그랑 병행하며, 귀국하는 그 길로 공항에서 달려와 한국리그 바둑을 둬야 된 게 몇 차례이며, 우승 상금이 무려 1억이나 되는 기전의 결승전 1국을 급하게 두다 결국 역전패하고 허겁지겁 공항에 달려가 겨우 비행기를 잡아 타고 다음 날 중국리그에 참가해야 됐던 건 나 몰라라, 이제부터 중국리그도 신경 써주겠으니 수익 일부를 내 놓으라 강짜다. 싫다니 기어이 웃기는 회의까지 열어 징계를 하느니 마느니, 대놓고 강도 짓거리다.
내가 국민은행, 또는 LG, 농심, 전자랜드 같은 회사의 수뇌라면 발 벗고 나서서 저딴 인간들이 득세하는 한국기원 주최 대회 따위 절대 후원 안 한다. 아무리 돈이 많대도 이미지에 일고 도움 안 되는 짓거리에 장단 맞춰 불똥 맞을 필요 뭐 있겠는가.
하지만 그것조차 망상일 뿐이라,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한가지를 하겠다는 거다.
구구절절 욕하기 싫대놓고 참 많이도 떠들었다. 흥분했더니 욱해서 괜히 눈물이 다 날라 한다.
조용히 혼자 욕 좀 하고, 이제 신경 끌란다.
이제 바둑 안 본다.
부디 이런 인간이 여기 단 하나 있는 게 아니길 바란다.
지금의 수뇌가 천년만년 한국기원 해먹고, 언젠가 무관심 속에 조용히 자폭하길 바란다.
그 때 가서 그 역시 모두 세돌 사범 때문이라며 징징징 발작하길 바란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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이지문 2009/06/24 17:07 편집/삭제 댓글 작성 댓글 주소
딱 한가지만 바란다면, 저는 진짜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능력이요!
그렇게 된다면야 돈은 저절로 따라 올 테고, 외모야 돈 있으면 웬만큼 업글시킬 수 있잖아요. 아니, 많이 업글시켜야 되긴 하지만요.
벨벳 2009/06/24 23:18 편집/삭제 댓글 주소
돈이 따라올 만큼 멋진 글 좋지요. 언젠가 그런 글 꼭 쓰는 겁니다!